안성기는 가장 오랜기간 원톱으로서 인기와 영향력을 누렸던 한국배우로서 그의 연기력은 늘 좋은평가를 받는 배우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외에도 한석규, 신성일이 충무로를 대표하는 한시대의 원톱스타였지만 신성일의 인기는 당대 미남배우였기에 누린것도 있어서 상대적으로 배우 자체의 연기력이나 능력에 대해서는 저평가를 받았습니다.
한석규는 연기력이 아주 출중했었지만 그의 인기가 최고인 시절은 대략 3년정도로 짧았다는 평입니다. 2000년대에는 송강호,최민식,설경구가 이끌었었는데 그들중 특출한 원톱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대 한국배우들중 가장 화려한 수상기록을 가졌는데, 국내 3대 영화상인 백상예상대상, 청룡영화상,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배우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사상가능한 주연상이 25회에 이르는 독보적인 배우입니다.
안성기는 5살때 첫 연기에 데뷔하여 8살때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에 출연하였습니다. 그 이후 이순재와 같은 무대에 섰었는데 그때가 중3시절이었고 그 후론 대입준비를 위해 공부했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참 일어나고 있던 당시 동성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재직중이던 아버지의 베트남에 진출할 생각으로 대학을 한국외대 베트남어과로 진학했습니다. 대학시절 안성기는 뜻하는 바가 있어 베트남에 가기 위해 학군장교에 지원합니다.
하지만 소위로 임관하기 직전에 베트남전은 종결되어버렸고 그럼에도 안성기는 포병 소위로 군복무에 충실히 복무하게됩니다. 그리고 복무당시 틈틈히 시나리오도 몇 편썼었는데 그것은 영화로 만들기 보다는 연기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는 전역후 일반 회사에 들어가려고 했었지만 그가 전공한 베트남어는 베트남이 공산화되어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던중 영화 병사와 아가씨들로 다시 연기에 도전하게 됩니다.
그때 당시 아역 출신 배우가 성인 배우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시절이라 그의 복귀에 대중의 의구심이 많았지만 안성기는 바람불어 좋은 날이라는 영화로 복귀에 성공하게됩니다. 그 이후 자리를 잡아 한국 영화의 80~9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남자 배우로 우뚝 서게됩니다.
그의 흥행작은 1982년 적도의꽃, 1984년 고래사냥, 1984년 무릎과 무릎 사이, 1985년 깊고 푸른 밤, 1985년 어우동, 1986년 이장호의 외인구단, 겨울나그네, 황진이, 1987년 기쁜 우리 젊은 날 등이 있습니다. MBC 무릎팍 도사에서 후배배우 신현준도 어린시절 안성기가 출연한 기쁜 우리 젊은 날이라는 영화를 보고 배우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합니다.
안성기는 배역이 폭이 넓은 배우로 지적인 캐릭터에서 어리숙한 캐릭터의 연기를 보여주었고 영화 그대 안의 블루에서는 까도남캐릭터의 연기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때당시 컬러 티비의 보급으로 TV 드라마가 인기였던 반면 한국영화는 침체기었습니다.
당시 영화배우들 대부분은 TV로 옮긴 경우가 잦았는데요. 하지만 안성기는 한국영화를 위해 TV 드라마 출연을 자제 하였고 그로 인해 성인배우로 복귀이후 TV 드라마 출연이 극히 드물었습니다.